건축가 김원은 우리의 전통과 풍토에 뿌리를 둔 건축을 추구하는 이다. 한국인이 지녀왔던 자연관과 세계관, 그 모든 철학을 되새겨 현재에 적합하게 적용하는 것을 지론으로 삼기에, 그의 건축에는 자연이 있고 역사가 있고 삶이 있다.
건축계에 몸담은 60여 년에 가까운 긴 세월 동안, 한결같이 보내온 우리 것에 대한 깊은 애정은 어디서 비롯됐을까. 그의 서재에서 그 단서를 찾아본다. 우리 전통 회화와 서예 작품들로 가득한 건축가의 서재에서 말이다.
김원과 전통 예술의 인연은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에서 시작됐다. 그의 아버지는 6·25전쟁 때 순직한 고위 공무원으로, 민족 문화를 사랑한 고미술 애호가였다. 일본에서 유학한 신여성이었던 어머니 역시, 전후 부산에서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그들을 후원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환경 덕분에 그는 어릴 때부터 예술과 문화를 가까이 접할 수 있었다. 유산으로 물려받은 작품 중 다수는 전쟁 후 부산으로 피란 온 예술가들의 애환과 고달픈 삶을 고스란히 담은 것이었다. 이후로도 그는 자신의 수집품을 더하여 대를 이은 문화유산 컬렉션을 채워갔다.
‘건축가의 서재’는 김원이 지금껏 수집해 온 우리 전통 회화와 서예 작품들을 소개하는 서화 작품집이다. 책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장인 ‘아름다운 유산’에서는 조선 후기 화가 심사정의 산수화를 비롯해 추사 김정희의 행초서 8폭 병풍, 오경석과 오세창 부자의 서예 글씨 등이 소개된다. 한국 전통 예술의 정수를 보여주며, 각 작품에 담긴 역사적 배경과 예술적 가치를 상세히 해설하고 있다.
두 번째 ‘풍류와 인연’에서는 허백련, 박생광, 정현복 등의 작품이 다뤄진다. 특히, 예술가들이 겪었던 시대적 아픔과 그 속에서 피어난 예술적 성취를 조명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에 담긴 의미를 전달한다.
세 번째 장 ‘여든, 나무를 심다’에서는 김용구, 송성용, 박노수 등의 현대 서예와 회화 작품들이 소개된다. 전통과 현대의 경계를 넘나들며, 김원이 수집한 예술의 다양성과 깊이를 볼 수 있는 장이다.
마지막 ‘현판에 담은 마음’에서는 김정희, 오제봉, 허행면 등의 현판 글씨를 소개하며, 현판이 예술가들의 정신과 철학을 담은 중요한 문화유산임을 상기시킨다.
책의 저자이자 고문헌 연구가인 석한남은 건축가 김원의 컬렉션을 독자들에게 상세히 소개한다. 60여 점의 작품에 대한 그림 화제(畫題)와 서예 글씨를 번역하고, 관련된 미술사적 해석과 소장 경위도 함께 설명한다. 또한, 한국 전통 회화와 서예의 아름다움, 예술가들의 숨은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했다. 저자는 “김원은 다양한 서체의 서예 작품이나 그림 속의 화제 글씨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사라져 가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며, “그래서 더 늦기 전에 대를 이어 소장한 서화 작품들을 제대로 풀이해서 정리하고 싶어 했다”고 전했다.
“노건축가의 서재에서는 2대에 걸친 예술가들과의 인연에 얽힌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그리고 한세월 여러 가지 가슴 뭉클한 숨은 사연들을 읽을 수 있다. 어쩌면 이 컬렉션을 통해 노 건축가가 부르는 쉰 목소리의 사친곡(思親曲)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의 서재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열정으로 지금도 여전히 우리 글씨와 그림으로 보태어 풍성해지고 있다.” ― 서문 중에서
김원은 자신의 컬렉션으로 우리 미술사의 중요한 순간들을 되살렸다. 예술과 역사가 한데 어우러진 기록들은 그의 철학을 보여주고, 예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영감과 깨달음을 선사한다. 그의 바람처럼 문화유산을 다음 세대에 전하기 위한 노력의 가치가 앞으로도 주목받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