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케
에디터 정호연 글 주리아 편집 조희정
자료제공 에이루트 건축사사무소
‘베케’는 제주 방언으로, 밭의 경계에 아무렇게나 쌓아둔 돌무더기를 이르는 말이다. 돌과 나무, 풀, 이끼가 한데 어우러진, 제주 자연의 강인한 생명력이 깃든 카페의 이름이기도 하다. 정원 중심 공간을 표방하는 이곳에서 건물은 자연에 주인공을 내어준다.
도로변에서 보이는 건물의 외관은 무표정하다. 묵직한 벽을 돌아 하부로 들어서면 커다랗고 어스름한 공간이 펼쳐진다. 이곳을 둘러보다 슬며시 열린 틈을 지나면 이내 방문객을 맞는 것은 제주의 바람이다. 이어서 짙은 회랑이 나오고, 그 길을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다시 밝은 자연이 반겨준다.
베케는 건축가와 조경가, 설치미술 작가가 함께 만든 공간이다. 이들은 자연과 건축이 서로 간의 반응을 주고받으며 관계를 맺고 조화를 이루도록 합심했다. 조경가는 대가 굵고 강한 조경수 대신 얇고 긴 나무와 여린 화초들로 자연스러운 숲을 조성했고, 건축가는 지형과 식물에 맞춰 건물의 조형을 다듬어 나갔다. 콘크리트 지붕과 기단, 그리고 유리로 이루어진 단순한 건물 너머에는 각기 다른 모양과 색을 지닌 나무들이 서 있다. 주변에 식재된 하늘거리는 꽃과 풀들은 건물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든다.
건축가가 계획 초기 단계부터 유념한 ‘걸으며 마주하는 자연’은 건물 배치와 동선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차에서 내리면 무성한 제주의 녹음이 마중하고, 울창한 수풀 사이에 꺾인 올레길을 따라 걸어가야 비로소 건물에 다다르게 된다. 넓고 간결한 라운지의 너른 창으로는 폐허 정원을 바라다볼 수 있으며, 솔비나무가 심어진 중정은 다음 공간으로 들어서기 전에 잠시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는 장소다. 문을 열면 나타나는 묵직한 회랑을 거쳐 전시실과 카페로 이동할 수 있다.
세 채의 건물과 이를 연결하는 두 개의 회랑은 자연에 둘러싸여 있다. 공간 사이의 관계와 열림과 닫힘의 비율, 빛과 그림자 등은 오랜 고민과 섬세한 조율 끝에 완성되었다. 자연 앞에서 건축은 절제된 단정함을 갖추고 있다.
건물은 자연의 경관 속에 자리 잡고 있어 어디서나 자연과 마주할 수 있다. 각 공간의 벽과 기둥은 자연을 감상하는 데 방해되지 않도록 적절히 배치하였고, 조명과 설비 또한 눈에 띄지 않게 설치되었다. 가구 역시 시야를 가리지 않는 높이와 색채로 간결하게 디자인되었다. 하드우드 대신 부드럽고 친숙한 소나무에 흑단 스테인을 입힌 가구에서는 따뜻하고 차분한 미감을 느낄 수 있다.
‘기분 좋은 어두움’은 베케를 설명하는 또 하나의 주제다. 예부터 제주에서 강렬한 햇살을 피하고자 집 내부를 어스름하게 만들었던 것처럼, 베케의 건물은 낮고 길게 조형되었고 어둠과 빛의 강한 대조가 깊은 공간감을 자아낸다. 짙은 마감과 의도한 어두움이 만들어낸 내외부의 극명한 대비는 바깥 자연을 차분하게 즐길 수 있도록 돕는다. 건물은 지형 위에 놓인 단단한 돌, 겹겹이 쌓인 나무와 여린 화초의 배경이 되어, 그 존재를 낮추고 풍경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있다.
작품명: 베케 / 위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신효동 1139-4외 1필지 / 설계: 에이루트 건축사사무소 / 설계팀: 강정윤, 이창규, 김현준 / 건물형태: 신축 / 시공: 주.더룩종합건설 / 조경: 더가든 (김봉찬) / 인테리어: 에이루트 건축사사무소, 선흘공방, 나무놀이터 / 구조설계: 드림구조 / 전기, 기계설계: 한성이엔지 / 용도: 제2종근린생활시설 (휴게음식점, 사무소) / 대지면적: 3,367m² / 건축면적: 584.96m² / 연면적: 862.89m² / 건폐율: 17.40% / 용적률: 21.90% / 규모: 지하 1층, 지상 2층 / 구조: 철근콘크리트구조 / 외부마감: 노출콘크리트 위 발수제 / 내부마감: 노출콘크리트 위 발수제, 적삼목 판재, 석고보드 위 페인트, 자기질 타일 등 / 완공: 2024 / 사진: 박영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