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여름, 런던의 명소인 켄싱턴 가든에 특별한 구조물이 등장했다.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파빌리온으로, 공원 안에 자리한 현대 미술관 ‘서펜타인 갤러리’가 자선 행사를 개최하기 위해 세운 임시 건축물이었다. 하디드는 사람들이 도심에서 모여 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유형의 공공공간을 제안했고, 건축과 예술의 경계를 넘어선 독창적 디자인을 선보임으로써 시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그렇게 시작된 ‘서펜타인 파빌리온’은 영국에 완공작이 없는 세계적인 건축가들을 초대해 갤러리 앞 잔디밭에 그들의 상상력을 담은 파빌리온을 선보이게 하는, 국제 건축계의 대표적인 연례행사로 자리 잡았다. 서울도시건축전시관에서 9월 25일까지 진행되는 ‘서펜타인 파빌리온의 순간들 2000-2024: 모두를 위한 영감의 공공공간’은 지난 23년간 서펜타인 파빌리온이 거쳐온 발자취들을 되돌아보는 특별한 전시다.
전시장으로 들어서면 천장을 뒤덮은 반투명한 그물 천막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삼각형 면들을 이어붙여 드리운 천막은 전통적인 텐트 개념에 도전하는 혁신적 디자인을 선보였던 자하 하디드의 파빌리온에서 착안한 것으로, 서펜타인 파빌리온의 상징성을 드러내면서 그 아래에 23년의 역사를 펼쳐낸다.
전시는 사진과 영상, 카탈로그와 리플렛 등 다양한 아카이브 자료로 구성된다. 파빌리온의 역사를 단순히 시간순으로 나열하기보다 각 파빌리온이 지닌 독창적 순간과 의미에 집중한다. 건축과 예술의 교차점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공간을 활용하는지, 공공성은 어떻게 해석될 수 있으며, 도시에서 공공공간의 역할은 어떻게 변해왔는지 등, 공공공간의 본질을 찾기 위한 다양한 질문들을 던진다. 올해 조민석이 설계한 ‘군도의 여백’은 기존의 형식을 벗어나, 다섯 개의 독립적인 구조물의 조합으로 이루어졌다. 구조물들은 중앙의 비워진 공간을 둘러싸고 있으며, 이는 한국 전통 가옥의 마당을 연상케 한다. 이러한 물리적 공백은 사람들 간의 교류와 소통을 위한 공간이 된다.
전시 기획을 맡은 스튜디오 히치의 박희찬은 “서펜타인 파빌리온은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으로, 그 안에서 사람들이 만나고 소통하며 새로운 경험을 만들어간다”며, 이번 전시를 통해 서울 시민들이 공공공간의 가능성을 재고해 보길 바란다는 기대를 전했다.
전시의 또 다른 중요한 주제 중 하나는 ‘지속 가능성’이다. 서펜타인 갤러리의 아트 디렉터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와 박희찬은 현지 자원을 최대한 활용해 전시를 구성했다. 전시 콘텐츠는 도면이나 모형 대신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되었으며, 모든 자료는 서울에서 출력되었다. 또한, 전시장의 패브릭 벽도 현장에서 제작되었고, 자석을 사용해 사진을 고정하는 방식으로 일회용 가벽을 대체했다. 전시장에서 사용된 가구들은 산림협동조합 창고에 방치된 목재를 재활용해 제작됐다.
2001-2007
2008-2013
2014-2019
2021-2023
2000, 2024
공공성에 대한 고민이 다소 무겁게 느껴진다면, 사진에 주목해 분위기를 환기해 봐도 좋다. 2006년부터 파빌리온을 촬영해 온 이완 반Iwan Baan을 비롯하여, 헬렌 비넷Helene Binet, 제임스 윈스피어James Winspear 등 세계적인 사진가들이 포착한 특별한 순간들은 그 자체로도 흥미롭기 때문이다. 특히, 헬렌 비넷이 아날로그 방식으로 기록한 2000년 자하 하디드의 파빌리온과 이완 반이 디지털로 기록한 2024년 조민석의 파빌리온 사진을 함께 감상하다 보면, 그간 사진 기술이 얼마나 발전했는지도 자연스럽게 체감할 수 있다. 이렇게 서펜타인 파빌리온의 본질적 가치를 재조명해 볼 이번 전시를, 공공공간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하고 영감을 불러일으켜 줄 문화적 자극제로 삼아보면 어떨까. 자료제공: 서울도시건축전시관 / 전시관 사진: 장미, C3